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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과 일본 1,500년 중일 관계의 역사를 직시하다

    중국과 일본 1,500년 중일 관계의 역사를 직시하다

    나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는 일본에 관한 두 가지 단편이 남아 있다.

    외할아버지의 방에는 동서양의 명저들이 가득 꽂힌 커다란 책장이 있었다. 그 책장의 유리문에는 커다란 붉은 천 하나가 걸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힘 있는 붓글씨로 ‘중일우호’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네 글자가 짊어진 감정의 무게를 전혀 알지 못했다.

    고모는 젊은 시절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한 일본인 남자를 만났고, 그는 후에 나의 고모부가 되었다. 고모가 처음으로 고모부를 데리고 중국에 돌아와 가족 모임에 참석했을 때, 나는 중국어를 전혀 못 하는 이 일본인을 그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로부터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도쿄의 한 병원에서 고모를 도와 고모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혈육의 정은 이미 오래전에 국경을 초월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중일 양국 관계를 한 단어로 형용한다면, 나는 ‘애증과 은원’이라 말하고 싶다. 이 책은 바로 중일 관계에 착목한 저작으로, 특히 양국이 서로를 깊이 배우려 노력했던 세 역사적 시기인 수·당 시대, 청말민초, 그리고 개혁개방기에 주목한다. 중일 양 민족 사이의 얽히고설킨 감정을 이해하고 싶은 이들이나, 혹은 한쪽의 역사만 알고 있어 상대측의 시각을 함께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단연코 가장 공정하고 객관적인 추천작이다. 저자인 에즈라 보겔 교수는 책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상대 국가를 싫어하는 많은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서양인이 쓴 중일 관계 서적에 흥미를 느끼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안다. 아무리 정확하게 쓴들 헛수고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양국 국민 중 나와 마찬가지로 중일이 서로를 이해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 쓴 것이다. 양국 모두에 독자를 둔 관찰자로서, 나는 이것이 나의 책임이라고 느낀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이미 알고 있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이 책이 전해준 ‘긍정적인 에너지’의 감정이다. 이 책은 보겔 교수가 타계하기 전 남긴 마지막 저작이다. 평생을 바쳐 중국과 일본을 연구한 보겔 교수가 인생의 마지막 감정을 이 한 권의 책에 기탁했으니, 그저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이 책의 중국어판 역자 서문에는 매우 함축적인 구절이 등장한다.

    어느 서구 학자는 최근 중일 간의 갈등을 ‘미안해’와 ‘고마워’라는 두 마디로 형용했다. 중국은 늘 일본을 비난한다. ‘미안해’라는 말을 너무 적게 하며, 그마저도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은 개혁개방 이후 일본의 막대한 경제 원조 덕분에 중국의 경제적 기적이 가능했음에도, 중국이 충분한 감사를 표하지 않으며 ‘고마워’라는 말을 아낀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문장은 한일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일례로 일본의 한 인기 정치인이 TV 생방송에서 “식민지 시대에 일본이 한국에 ‘진보’를 가져다주었으니 한국은 일본에 더 감사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민간의 영역으로 들어와 내 주변을 살펴보면, 국가 간의 문제로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이들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경험한 일상은 회사에서 중국인과 일본인 동료들이 함께 노래방에서 『여인화』를 합창하며 웃음꽃을 피우는 장면들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꺼이 애국자가 되겠지만, 그 이전에 ‘인간’이고 싶다. 만약 두 가지를 겸할 수 없다면 나는 언제나 ‘인간’을 택하겠다.” 나의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모두 노련한 혁명가이자 당원이셨지만, 나는 그분들에게서 어떠한 증오의 언사도 들어본 적이 없다. 보겔 교수와 마찬가지로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우정이 영원하기를 갈망하는 것이야말로 그들 세대의 가장 소박한 진심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그 붉은 천.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의 선조들 또한 ‘일의대수’라 이름 붙여진 화권 위에 그들의 필묵을 휘두르지 않았던가. 나는 우리 세대, 나아가 우리 뒤의 세대들까지도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운 미덕을 계승해 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 책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진정한 메시지일 것이다.

  •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워런 버핏이 버크셔 해서웨이의 CEO로서 마지막으로 참석했던 주주총회에서, 한 중국인 청중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은 좋은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당신은 언제 태어나고 싶습니까? 100년 전, 500년 전, 1,000년 전, 아니면 지금입니까? 의심의 여지 없이, 당신은 행운아입니다.”

    과연 우리가 처한 이 시대는 좋은 시대이다. 저서 《팩트풀니스》가 밝혀냈듯, 이 세상에 관한 어떤 진실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상보다 훨씬 나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하지만 시각을 개인의 차원으로 확대해 보면 어떨까? 만약 내가 당신에게 “현재의 사회 환경과 경제 상황에 만족하십니까? 앞으로의 인생에 불안함을 느끼지는 않습니까?”“당신은 행복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시대는 여전히 ‘힘든 시대’라는 결론 말이다.

    이민에 관하여 — 어떤 정치 집단이 사회 문제의 화살을 이민자에게 돌려 높은 지지율을 얻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사회가 분명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말이 과연 진실일까? 우리 역시 경제학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이민이 경제에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자유무역에 관하여 — 일부 국가들이 관세 장벽을 세워 무역 자유화를 포위하고, 그것이 점차 세계적인 전쟁으로 번져가는 모습을 볼 때면 우리가 힘든 시대의 늪에 빠져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전쟁에 승자는 없다’는 말은 진부한 경구이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다면 경제학자들의 눈에 비친 자유무역 문제는 과연 어떠할까?

    경제 성장에 관하여 — 저서 《일하지 않을 권리》에서 저자는 사회학적 관점으로 “경제 성장을 국가 번영의 척도로 삼는 시대착오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정치적 시각에서 보면 성장을 포기한다는 것은 국가 간의 수 싸움에서 주도권을 상실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딜레마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어떤 관점을 견지하고 있을까?

    《좋은 경제학》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경제학자의 시선으로 풀어낸 책이다. 이 책은 다루는 주제가 광범위하고 논증 또한 매우 탄탄하며, 거시경제학 교양서로서 무척 훌륭하고 이해하기 쉽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좋은 시대인 동시에 힘든 시대이기도 하다. 이 시련을 더 나은 방향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우리 개개인의 관심과 참여가 절실하다. 이 책의 저자가 말했듯이 말이다. “경제학은 너무나 중요해서, 경제학자들에게만 온전히 맡겨둘 수 없다.”

  • 일하지 않을 권리 쓸모없는 인간에 대한 반론

    일하지 않을 권리 쓸모없는 인간에 대한 반론

    당신에게 묻고 싶다. 하루의 업무는 언제 시작되고, 언제 진정으로 끝나는가? 아마 많은 이들이 직장에 발을 들이고 나가는 순간이나 근태 기록 등을 근거로 이 질문에 아주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사실은 그리 간단치 않다. 업무 외의 시간에도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일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으며 좌우된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은 사적인 삶을 즉시 내팽개쳐도 되는 정당한 사유가 되었고, 여행을 가거나 병원 진료를 받을 때조차 업무상 차질이 없도록 모든 것을 완벽히 배치해둔 뒤에야 겨우 안심하고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비노동 시간의 잠재적인 목적은 오직 사람들이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데 있다. 즉, 자유 시간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이 세계가 ‘노동이 곧 정의이며, 노동이 곧 도덕’이라는 가치관을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관에 인도되어 많은 이들이 일을 위해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노동과 삶, 과연 어느 쪽이 수단이어야 하고 어느 쪽이 목적이어야 하는가?

    안타깝게도 ‘삶이 곧 정의이며, 삶이 곧 도덕’이라는 말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나 자신의 경우만 보더라도, 입사 초기 몇 년간의 ‘밀월기’에는 연휴가 너무 길다고 느끼곤 했다. 황금연휴가 7일씩 이어지면 마지막 며칠은 지루함이 밀려와 어서 빨리 출근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일찍이 사람들이 여가 시간의 증가가 가져올 무료함을 걱정한다면, 우리는 이를 “현재 우리 문명에 대한 규탄”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 시대는 여가 시간의 무료함을 규탄하지 않는다. 우리 시대가 규탄하는 것은 ‘일하지 않는 것’이다. 일하지 않는 것은 곧 부정이요, 일하지 않는 것은 곧 부도덕이라 여겨진다. 자기소개를 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질문을 떠올려 보라.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사실 “당신이 이 세상에 기여하는 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라. 나는 당신의 대답에 근거해 당신을 평가하겠다”라는 뜻이거나, 혹은 “당신은 알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시대에, 현대 사회에서 노동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위기로 인해 능동적으로 ‘각성’했든, 사회적 환경에 의해 수동적으로 ‘탕핑(누워 있기)’을 선택했든 말이다. AI 혁명이 진행 중인 지금, 이 책에 담긴 사유는 우리 시대와 다음 세대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당장 ‘노동에 거부 선언’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저자가 말했듯 다음과 같은 성찰이 필요하다.

    나는 노동의 의미와 미래를 둘러싼 생기 넘치고 진보적인 토론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는 방식이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임을 기억하고, 노동을 분배하는 다른 가능성들을 탐색하기를 희망한다. 전통적으로 노동 안에서 찾았던 즐거움과 연대의 기쁨을 경험할 다른 통로가 있는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노동 밖에서 다양하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할 권리를 옹호하고,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 게임에 덜 가담하면서 자아를 실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경제 성장을 국가 번영의 척도로 삼는 시대착오적인 사고를 근본적으로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진보와 행복에 관한 또 다른 비전, 즉 건강과 자유 시간, 잠재력을 실현할 권리와 같은 비물질적 자산에 기초한 비전을 받아들여야 한다.

  • 아무것도 안 하는 편이 이득인 일본: 사회에 퍼지는 ‘소극적 이기주의’의 구조

    아무것도 안 하는 편이 이득인 일본: 사회에 퍼지는 ‘소극적 이기주의’의 구조

    입사 1년 차 망년회 때, 나는 우연히 사장님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내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장님은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갓 입사한 자네에게는 주변의 모든 것이 아직은 신선하게 보이겠지…….”

    의미심장했던 것은 사장님이 내뱉은 전반부 문장이 아니라, 차마 말하지 않은 나머지 절반이었다. “……몇 년만 지나면 자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겠지만 말이야.”

    실제로 일을 시작한 처음 몇 년은 신선했고 열정이 넘쳤다. 하지만 몇 년이 흐르자 서서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왠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당시의 나는 알지 못했으나, 무척이나 알고 싶었다. 그 의문에 답을 제시해 준 이가 바로 ‘일본 조직 사회학의 일인자’로 불리는 오오타 하지메 교수였다.

    오오타 교수의 저서 『개인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 일본의 조직』은 그 제목만으로도 핵심을 찌른다. 왜 일본식 조직은 개인의 행복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었는가? 저서 『동조압력의 정체』에서 오오타 교수는 그 근본 원인으로 일본 기업이 보유한 ‘세 가지 신기’인 종신고용제, 연공서열제, 기업별 단일 노조를 꼽는다. 과거 ‘황금기’에는 이 세 가지 기둥이 사회의 번영과 경기를 지탱해 주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한 오늘날의 사회적 배경 속에서, 이 세 가지 신기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아무것도 안 하는 편이 이득인 일본’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것도 안 하는 편이 이득’인 현상은 매우 보편적이다. 어느 정도 직급에 올라가면 많은 기업의 직원들은 적극적으로 노력하기를 포기하고 적당히 ‘현상 유지’를 택한다. 연공서열제 때문에 열심히 노력해도 더 올라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사 평가 제도에 철저히 뿌리 내린 ‘감점주의’는 모험을 하지 않고 모나게 행동하지 않는 것을 최상책으로 만들었다. 또한 종신고용제는 기업이 잉여 인력을 마음대로 감축할 수 없게 하기에, 근무 태만도 해고라는 처벌로 이어지지 않는다. 동시에 기업의 이익과 운명을 같이 하는 단일 노조는 노사 협상에서 입지가 매우 약해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향상심을 갖는 것조차 무의미한 감정으로 전락시킨다. 이 모든 상황은 결국 우리 사회에서 소극적 이기주의를 신봉하는 ‘복지부동형 구태’의 행렬을 끊임없이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일본식 조직에서는 혁신이 싹틀 수 없으며, 글로벌화의 물결 속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다.

    현재 우리는 일본의 기업 조직이 붕괴되는 징후를 목격하고 있다. 신입 사원의 이직률은 계속해서 높아지고, 관리직 승진을 희망하는 숙련 직원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임금 상승률은 물가 상승을 따라잡지 못하며, 일부 기업에서는 기준에 미달하면 직급을 강등시키는 인사 평가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오오타 교수의 책을 볼 때마다 깊은 공감을 느끼는 동시에, 책에서 언급된 문제들에 대해 그가 어떤 처방을 내릴지 기대하게 된다. 다만 매번 희망적인 의견을 충분히 확인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곤 했다. 이는 저자의 식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일본식 조직 구조가 이미 이 사회를 너무나 깊이 병들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오오타 교수의 최신 저서 『이직 제로, ‘자영형 사원’이 회사를 바꾼다!』에서 마침내 납득할 만한 해독제가 제시되었다. 모든 병을 고치는 특효약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희망을 느끼게 해주는 한 권이다.

  • 21세기 자본

    21세기 자본

    생각해 보면 참 묘한 일이다. 나는 학교 수업에서 ‘경제학’이라는 과목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학교에서 가르쳐준 경제 관련 지식이라곤 기억 속에 파편처럼 남아있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인으로서 우리는 ‘철학’, ‘역사’,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는 있어도, 혹은 학창 시절 배운 ‘수학, 물리, 화학’ 공식들을 모조리 선생님께 반납해 잊어버렸을지언정, ‘경제’가 자신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유튜브에는 수백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Xiao Lin Shuo’라는 유명 경제·금융 채널이 있는데, 나 역시 그 채널의 충성스러운 시청자 중 한 명이다. 초기 영상 중에 책을 추천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당시 샤오린은 『천재들의 실패』, 『대마불사』, 『괴짜 경제학』처럼 서사성이 강한 작품들을 추천했다. 하지만 거시경제학 관련 서적에 대해서는 일종의 ‘여백’을 남겨두었다. 만약 그 여백을 나더러 채우라고 한다면, 나의 첫 번째 선택은 단연 이 책,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일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간단히 밝히고자 한다.

    첫째, 이 책은 매우 야심 찬 책이다. 나는 그동안 야심을 내세운 수많은 책을 보아왔으나, 그중 대다수는 내용이 막연하거나, 부분적인 것을 전체로 오해하거나, 혹은 구조가 느슨하고 주제가 불분명했다. 하지만 『21세기 자본』은 명백히 그 부류가 아니다. 이 책의 주제는 빈부격차(혹은 부의 분배 불평등)의 역사적 진화 과정과 그 결과이며, 그 야심은 세계 전체를 향해 있다. 야심에 관해 말하자면, 나폴레옹은 말발굽과 대포로 세계를 정복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하지만 피케티는 단 한 권의 책으로 이 세상의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냈다.

    둘째, 이 책은 세상이 어떠한지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그 이면의 깊은 이유, 즉 세상이 왜 이런 모습인지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경제학적 개념과 분석 연구가 동원되는데, 이 때문에 이 책은 결코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경제학 전공 대학생조차 어렵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니, 나 같은 ‘경제 알못’에게는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독자들이여, 이 ‘어렵다’는 단어에 겁먹지 마시라. 우리가 이 책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일생에 도움이 될 만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만약 우리가 빈부격차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에게는 처방전이 필요하다. 그리고 피케티는 감히 처방전을 내리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아마도 이 부분이 책에서 가장 널리 토론되는 지점일 것이다. 나는 모든 학문 중에서 경제학이 가장 말다툼이 잦은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거시 세계의 온갖 경제 문제가 하루아침에, 혹은 단 한 번의 수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저자의 ‘초석을 다지는’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모두가 토론에 참여할 때 비로소 사상과 제도의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 H마트에서 울다

    H마트에서 울다

    눈물이 필요한 당신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 헬렌 켈러 자서전

    헬렌 켈러 자서전

    최근 한 친한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숲속을 한참 동안 산책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나는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대답했다. ‘특별한 건 없었어.’ 만약 내가 그런 대답에 익숙해져 있지 않았더라면 결코 믿지 못했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눈이 있는 사람일수록 정작 보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해 왔기 때문이다.

    —— 헬렌 켈러, 『사흘만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의 일생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로맹 롤랑의 이 말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진정한 영웅주의가 있다. 그것은 세상의 참모습을 보고 나서도, 여전히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 데일 카네기의 링컨 이야기

    데일 카네기의 링컨 이야기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뼈와 근육을 수고롭게 하며, 몸을 굶주리게 하고, 처지를 궁핍하게 하여 그가 하는 일마다 어긋나게 하느니라. 이는 그의 마음을 두드려 성질을 참게 함으로써 그가 할 수 없었던 바를 더 많이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 『맹자』


    링컨은 위인인가?

    아니다, 링컨은 위인이 아니다.

    링컨은 성인이다.

  • 처칠: 운명과 함께 걷다

    처칠: 운명과 함께 걷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슬픔과 시름에 잠기지만, 이윽고 별들이 점화되어 저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일깨워준다.

    —— 윈스턴 처칠, 『강 전쟁』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처칠에 대한 정보라고는 역사 교과서에 실린 서너 줄의 문장이 전부였을 뿐, 인간 처칠의 진짜 모습에 대해서는 무지에 가까웠다. 문득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이 처칠을 읽는지 궁금해져 호기심에 이 대작을 펼쳤고, 결과적으로 나 또한 그의 매력에 빠져들어 책을 덮을 수 없었다.

    처칠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저자는 책의 결말에서 서른 개가 넘는 명사를 동원해 그의 정체성을 정의했다. 나 또한 그 뒤를 따라 몇 가지 키워드를 뽑아 처칠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첫째, 처칠은 뼛속까지 진정한 귀족이었다. 평생 의식주 전반에 걸쳐 누군가의 수발을 받아야 했고, 그런 태생적 배경 탓에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생활 기술조차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스스로 공복이 되기를 자처했다. 평생을 국가에 헌신하고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데 바쳤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위기 속에서 처칠은 직접 발로 뛰며 동맹을 결속시킨 통합의 아이콘이었다. 동쪽에서 매를 맞는 동맹국과 서쪽에서 매 맞기를 주저하는 동맹국을 하나의 밧줄로 단단히 묶어놓은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스스로 여행가가 되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총리이자 국방부 장관으로 재임한 1,900일 동안, 그는 배와 기차, 비행기를 갈아타며 총 11만 마일을 여행했다. 카이로 4회, 워싱턴과 모스크바를 각 3회, 퀘벡 2회, 그리고 버뮤다, 테헤란, 카사블랑카, 이탈리아, 노르망디, 파리, 몰타, 얄타, 아테네, 벨기에, 베를린.

    처칠은 뛰어난 문필가이자 웅변가였다. 노벨 문학상은 그에게 있어 지고지순한 영예였으며, 한림원은 “역사적·전기적 묘사의 숙련함과 고귀한 인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보여준 찬란한 웅변”이라고 그를 평가했다. 동시에 그는 유머의 달인이기도 했다. 해방된 직후의 파리를 방문했을 때, 그는 연설에 앞서 청중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여러분께 경고 하나 하겠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저는 지금부터 프랑스어로 말할 작정입니다(혹은 시도할 것입니다). 이는 매우 끔찍한 임무이며, 영국에 대한 여러분의 우정을 시험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처칠은 부정할 수 없는 울보였다. 어쩌면 풍부한 감정 표출 덕분인지, 과도한 음주에도 불구하고 90세까지 장수하며 생존의 전설이 되었다. 그는 생전에 국왕, 동료, 연합군 등 수많은 친숙한 얼굴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노년의 그는 정계의 마스코트이자 살아있는 신화였으며, 후배 정치인들이 추앙하는 불멸의 아이콘이었다.

    처칠의 생애는 ‘위인’이라는 두 글자의 정의를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한 사람이 처칠과 같은 인생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후회 없는 삶’이라 불릴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 오보카타 하루코 일기

    오보카타 하루코 일기

    오보카타 하루코의 수기 『그날』을 읽고 난 후, 나의 내면에는 한동안 가라앉지 않는 파문이 일었다. 그것은 과학적 진실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이 사회의 진실—그 비정함과 무심함—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명이 다할 것 같다고 느꼈을 때, 눈앞에 떠오른 것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촛불이었다.

    생명이란 이 차갑고 회색빛인 세계 속에서 무력하게 흔들리는 가느다란 등불과도 같다. 전신을 휘감는 우울, 병마에 유린당한 육체, 잠 못 이루는 밤. 약의 힘을 빌려 겨우 잠들어도 깨어나기 전까지 이어지는 악몽의 연쇄. 분노, 억울함, 의구심, 고독, 공포…… 매 순간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마음을 잠식한다. 그 모든 것에 맞서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끝없이 흐르는 눈물뿐이다. 사람은 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꺼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본능이었다. 몇 번이고 그 간절함을 경험하고, 차라리 불어서 꺼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면서도 필사적으로 지켜내고 있었다.

    그것은 희망일까? 판도라의 상자 바닥에 봉인된 마지막 희망. 보이지만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희망.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고통과 고문을 안겨주기 위해 존재하는 희망. 우스꽝스러운 희망. 죄악스러운 희망. 아니다, 그것은 희망이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는 분명 사람이 살아가게 만드는 또 다른 무언가가 존재한다.

    줄곧 나 혼자만의 불꽃을 지켜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촛불이 꺼지려 할 때, 기꺼이 불꽃을 나누어 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다. 가장 신뢰하는 벗들이 보내주는 우정이며,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가족들의 사랑이다. 사회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격려하며 도움을 준 이들의 동정이며, 자신을 그저 한 명의 평범한 인간으로 대해준 모든 이들의 공감이다. 그것은 곧 ‘사랑’이다. 사랑이 있기에 이 세계는 비로소 온기를 띠고 색채를 얻는다.

    나는 나누어 받은 불꽃을 다시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며 살아갈 것이다. 오늘의 일기에는 그렇게 적을 생각이다.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