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와의 대화

구스타프 야누흐

1968

아버지는 크게 당황하여 그저 바닥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카프카 박사가 집무 책상 앞에 앉아서야 아버지는 겨우 다시 말을 엮어냈다.
“박사 선생, 당신은 반역자요.”


“안타깝게도,” 카프카가 말했다. “내가 가담한 것은 가장 진을 빼는, 거의 절망에 가까운 봉기입니다.”


“누구에 대한 저항인가?”


“나 자신에 대한 저항입니다.” 카프카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안락의자에 몸을 기댔다. “나 자신의 한계와 나태에 대한 저항이지요. 근본적으로는 이 집무 책상과 이 의자에 대한 저항입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유독 깊은 인상을 남긴 두 편의 글이 있다. 한 편은 루쉰의 《약》인데, 기억에 많이 남는 이유는 수업 시간에 이 작품으로 직접 연극을 하며 내가 인혈 만두를 사러 가던 늙은 아버지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 편은 카프카의 《법 앞에서》였다. 다만 이 글이 기억에 남은 것은 내용이 심오해서가 아니라,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추상적이고 신비로웠기 때문이다. 당시 고등학생에게 추상성과 신비로움이란 곧 ‘고상함’을 의미했다. 이는 마치 어떤 친구가 요즘 니체를 읽고 있다고 말했을 때, 김용의 무협 소설을 읽고 있던 내가 완전히 기가 죽어 아무 말도 잇지 못했던 순간의 느낌과 비슷하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카프카 중단편 소설 전집》을 펼쳤고 그곳에서 《법 앞에서》를 다시 만났다. 그간 인생의 연륜이 제법 쌓였으니 학창 시절의 나보다는 이 글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막연히 자만했으나, 결과는 달랐다. 다시 읽은 그 글 속의 우화는 도저히 그 속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더욱 모호해져 있었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손에서 태어난 모든 문장이 나에게는 그저 지난하고 난해하게만 다가왔다.

그 후 나는 이 책 《카프카와의 대화》를 읽었다. 그제야 나는 왜 이토록 카프카를 읽어내지 못했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카프카라는 ‘인간’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카프카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법학 박사였으나 노동자재해보험공단에 다니는 평범한 직원이었다. 스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반역자’였고, 그의 절친한 친구 막스 브로트의 묘사에 따르면 ‘집 없는 이방인’이었다. 카프카에게는 자신의 집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집이라고요?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뿐입니다. 나만의 작은 방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집이 아닙니다. 내 안의 불안을 가려주는 듯하면서도 실상은 나를 그 안에 더욱 깊이 침잠시키는 은신처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문학 창작이란 카프카에게 어쩌면 낮 세계의 현실과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기 위한, 무력한 수단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이 음울한 불면의 밤들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글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밤들로 인해 나는 내가 어둠의 고독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다시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카프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컨대 《변신》을 읽으며 나는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은둔형 외톨이를 연상하지만, 이는 결코 저자가 창작 당시에 의도했던 본래의 의미는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삶의 경험과 카프카의 인생 사이에 과연 얼마만큼의 공통분모가 있겠는가? 애초에 우리의 삶에 카프카가 필요하기는 한 걸까? 카프카 스스로가 이렇게 말했듯이 말이다.

“우리는 삶으로부터 수많은 책을 비교적 쉽게 짜낼 수 있지만, 책으로부터 삶을 짜낼 수는 없다.”

우리가 카프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낮이 밤의 어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몇 번이고 다시 카프카를 읽고 싶어 한다. 왜일까? 그것은 우리가 카프카라는 인간을 알아버린 이상, 빛 한 줌 들지 않는 고독과 절망으로 가득 찬 그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 속에 그를 차마 혼자 외롭게 버려둘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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