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읽었던 책은 거의 대부분 소설이었다. 한 번은 연구실 선배가 나에게 “비문학 서적을 좀 더 읽어보게. 소설은 그리 큰 의미가 없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의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상아탑을 떠나 사회에 발을 내디딘 후에야 비로소 그 관점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현실 세계에 대해 더 깊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했던, 지금 일어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나타날 이야기들을 갈구하게 되었다. 반면 소설은 다른 차원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점차 소설을 멀리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소설을 조금 가볍게 여기기까지 했다. 마치 휴식을 취할 때 가끔 먹는 정크푸드처럼 말이다.
하지만, 『전쟁과 평화』를 읽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이 책이 나에게 준 느낌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충격’이다. 그 충격을 어떻게 형용할 수 있을까?
『전쟁과 평화』는 하나의 서사시다. 웅장한 전쟁 장면의 복원뿐만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는 작가의 광활한 상상력 속에 침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톨스토이는 리얼리즘의 거장이다.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소설 속 인물들의 곁에 서 있는 듯한 임상감을 느끼게 되며, 그들의 표정과 몸짓을 또렷이 보고, 그들의 대화와 독백을 들으며, 그들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체감하게 된다. 톨스토이의 문장력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아래 구절처럼 시각적 이미지가 매우 강렬하게 다가오는 대목이 그러하다.
로스토프가 들어온 순간부터 그녀의 얼굴은 홀연히 변했다. 그것은 사방에 정교한 조각과 채색이 된 등불과 같았다. 원래는 투박하고 어둡고 보잘것없어 보였으나, 일단 그 안에서 불이 켜지자 이 복잡하고 정교한 예술품은 돌연 예상치 못한 놀라운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마리아 공녀의 얼굴이 갑자기 변한 것이 바로 그러했다.
『전쟁과 평화』 속에는 역사에 대한 탐구와 철학적 사유가 종횡으로 엮여 있다. “역사 속 영웅의 의지는 대중의 활동을 인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늘 인도당하는 쪽이다”라고 톨스토이는 썼다. 자유, 죽음, 종교, 사랑 등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제에 대해, 어느 순간 나는 피에르의 머릿속에서 내가 했던 생각을 발견하고 경악하며, 다음 순간에는 안드레이 공작의 눈을 통해 내가 보았던 환영을 목격한다. 독자인 나는 수시로 읽기를 멈추고 사색에 잠겨야만 한다. 그 질문들을 이해하고 해결하려 애써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결국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책들은 마지막 장을 덮고 났을 때, 첫 장을 펼치기 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음을 깨닫게 한다. 나에게 있어 『전쟁과 평화』가 바로 그런 책이었다. 이 책은 내 마음속 ‘소설’의 위상을 근본적으로 다시 세워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