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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프카와의 대화

    카프카와의 대화

    아버지는 크게 당황하여 그저 바닥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카프카 박사가 집무 책상 앞에 앉아서야 아버지는 겨우 다시 말을 엮어냈다.
    “박사 선생, 당신은 반역자요.”


    “안타깝게도,” 카프카가 말했다. “내가 가담한 것은 가장 진을 빼는, 거의 절망에 가까운 봉기입니다.”


    “누구에 대한 저항인가?”


    “나 자신에 대한 저항입니다.” 카프카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안락의자에 몸을 기댔다. “나 자신의 한계와 나태에 대한 저항이지요. 근본적으로는 이 집무 책상과 이 의자에 대한 저항입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유독 깊은 인상을 남긴 두 편의 글이 있다. 한 편은 루쉰의 《약》인데, 기억에 많이 남는 이유는 수업 시간에 이 작품으로 직접 연극을 하며 내가 인혈 만두를 사러 가던 늙은 아버지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 편은 카프카의 《법 앞에서》였다. 다만 이 글이 기억에 남은 것은 내용이 심오해서가 아니라,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추상적이고 신비로웠기 때문이다. 당시 고등학생에게 추상성과 신비로움이란 곧 ‘고상함’을 의미했다. 이는 마치 어떤 친구가 요즘 니체를 읽고 있다고 말했을 때, 김용의 무협 소설을 읽고 있던 내가 완전히 기가 죽어 아무 말도 잇지 못했던 순간의 느낌과 비슷하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카프카 중단편 소설 전집》을 펼쳤고 그곳에서 《법 앞에서》를 다시 만났다. 그간 인생의 연륜이 제법 쌓였으니 학창 시절의 나보다는 이 글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막연히 자만했으나, 결과는 달랐다. 다시 읽은 그 글 속의 우화는 도저히 그 속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더욱 모호해져 있었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손에서 태어난 모든 문장이 나에게는 그저 지난하고 난해하게만 다가왔다.

    그 후 나는 이 책 《카프카와의 대화》를 읽었다. 그제야 나는 왜 이토록 카프카를 읽어내지 못했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카프카라는 ‘인간’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카프카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법학 박사였으나 노동자재해보험공단에 다니는 평범한 직원이었다. 스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반역자’였고, 그의 절친한 친구 막스 브로트의 묘사에 따르면 ‘집 없는 이방인’이었다. 카프카에게는 자신의 집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집이라고요?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뿐입니다. 나만의 작은 방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집이 아닙니다. 내 안의 불안을 가려주는 듯하면서도 실상은 나를 그 안에 더욱 깊이 침잠시키는 은신처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문학 창작이란 카프카에게 어쩌면 낮 세계의 현실과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기 위한, 무력한 수단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이 음울한 불면의 밤들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글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밤들로 인해 나는 내가 어둠의 고독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다시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카프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컨대 《변신》을 읽으며 나는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은둔형 외톨이를 연상하지만, 이는 결코 저자가 창작 당시에 의도했던 본래의 의미는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삶의 경험과 카프카의 인생 사이에 과연 얼마만큼의 공통분모가 있겠는가? 애초에 우리의 삶에 카프카가 필요하기는 한 걸까? 카프카 스스로가 이렇게 말했듯이 말이다.

    “우리는 삶으로부터 수많은 책을 비교적 쉽게 짜낼 수 있지만, 책으로부터 삶을 짜낼 수는 없다.”

    우리가 카프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낮이 밤의 어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몇 번이고 다시 카프카를 읽고 싶어 한다. 왜일까? 그것은 우리가 카프카라는 인간을 알아버린 이상, 빛 한 줌 들지 않는 고독과 절망으로 가득 찬 그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 속에 그를 차마 혼자 외롭게 버려둘 수 없기 때문이다.

  • 오쿠로 가는 작은 길

    오쿠로 가는 작은 길

    길에 병드니 / 꿈은 마른 들판을 / 헤매고 도네.

    — 마츠오 바쇼


    인생은 나그네길이다. “대저 천지는 만물이 잠시 쉬어가는 여관이요, 광음은 백 대를 거쳐 가는 나그네다.” 이는 당나라의 시인 이백이 733년에 써 내려간 인생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다. 그리고 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 마츠오 바쇼는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의 서두에서 마치 이 문장에 화답하듯 이렇게 적었다.

    해와 달은 백 대의 나그네이며, 오고 가는 해 또한 여행자다.

    옛 문인과 지사들이 조정의 높은 곳에 처해 국정을 걱정하거나, 혹은 강호의 먼 곳에 머물며 마음속 무릉도원을 그렸다면, 마츠오 바쇼는 오롯이 여행을 길 위에서 인생을 깨달아갔다. 이 하이쿠 성인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이 기행문에서, 내가 유독 아끼는 몇 대목을 골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가는 봄이여 / 새는 울고 / 물고기 눈에는 눈물.

    옛사람들에게 먼 길을 떠나는 여행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길을 나서는 순간에는 평소에 더없이 평범하게 보였던 사물과 풍경조차 나그네의 마음에 서글픈 감정을 더하곤 했다. 그러나 이별의 슬픔이 비단 여행의 시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정의 후반부에 이르러, 줄곧 바쇼의 발자취를 따르며 동행했던 제자 소라가 병으로 인해 스승과 헤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제 홀로 남겨져 고독한 여정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바쇼는 만감이 교차하여 이렇게 읊었다.

    떠나는 자의 슬픔과 남는 자의 회한은, 마치 짝 잃은 기러기 한 마리가 헤어져 저 멀리 구름 속을 헤매는 듯하구나.

    길 위에서는 자연스레 온갖 만남과 견문이 따르기 마련이다. 전권 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대목은 나스노(도치기현)을 지나갈 때의 일이다. 길을 잃은 나그네는 그곳의 한 소박한 농부를 만나게 된다. 농부는 농사일로 바빠 직접 길을 안내해 줄 수는 없었지만, 선뜻 자신의 늙은 말을 빌려주며 길잡이로 삼게 했다. 그리고 뒤이어 펼쳐지는 야취 가득하고도 가슴 한구석을 따스하게 채워주는 정경은 다음과 같다.

    어린아이 둘이 말의 뒤를 따라 뛰어왔다. 한 아이는 어린 소녀였는데 이름이 ‘카사네’라 했다. 귀에 낯선 그 이름이 참으로 다정하게 느껴져 소라가 시를 읊었다.

    카사네란 이름 / 필시 패랭이꽃 / 겹꽃의 이름이리라.


    이윽고 인가에 이르러 말의 삯을 안장에 묶어두고 말만 돌려보냈다.


    “사람은 한가로이 계수나무 꽃 떨어지고, 밤은 고요해 봄 산이 비었구나.” 어느 시대에나 속세를 초월한 은사는 존재한다. 스카가와(후쿠시마현)이라는 곳에서 바쇼 일행은 하이쿠 시인 릿사이를 방문했다. 릿사이는 세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커다란 밤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초암에 은거하는 이였다. 바쇼는 그를 위해 이러한 가구를 선물했다.

    세상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꽃이여 / 처마 밑의 밤나무.

    이이즈카 온천(후쿠시마현)에 다다랐을 때, 바쇼는 심한 복통에 시달려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묵게 된 숙소는 비가 새는 데다 모기까지 극성을 부려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앞으로 가야 할 험난한 길을 생각하니 마음속에 불안이 엄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쳤을 바쇼였지만, 그는 자신을 채찍질하듯 이렇게 스스로를 격려했다.

    변방의 오지를 다니는 행각이란 본래 목숨을 버리는 무상의 관념을 품는 법이니, 길 위에서 죽더라도 그것은 하늘의 명이라 여겼다. 이에 기운을 조금 추스르고 사방으로 뻗은 길을 밟아 다테의 커다란 관문을 넘어섰다.

    이즈모자키(니가타현)의 바닷가에 이르러, 옛날에 유배지로 쓰였던 저 멀리 바다 위의 사도섬을 바라보며 바쇼는 읽는 이의 마음을 뒤흔드는 장엄한 절창을 남겼다.

    거친 바다여 / 사도섬 위에 가로누운 / 은하수.

    이치후리(니가타현)이라는 곳에서는 숙소에서 우연히 두 명의 유녀와 동숙하게 된다. 청춘을 유곽에 바친 유녀와 천하를 떠도는 하이쿠 시인. 도저히 겹칠 것 같지 않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지만, 명명한 운명 속에서 어딘가 통하는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바쇼는 서글픈 감회를 담아 이러한 구절을 남겼다.

    한집에서 / 유녀들도 잠드는구나 / 싸리꽃과 달.

    이것은 바로 백거이가 《비파행》에서 읊었던, “똑같이 세상 끝을 떠도는 신세이니, 만났으면 그만이지 어찌 예전부터 알던 사이여야 하겠는가”라는 경지와 정확히 맞닿아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가도카와 서점에서 나온 이 판본의 《오쿠로 가는 작은 길》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구성이 대단히 풍성하다. ‘원문’은 물론이거니와 친절한 ‘현대어 번역’, ‘해설’, ‘칼럼’까지 망라되어 있다. 단순히 문장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이 당시의 역사와 풍토, 인문학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에 기꺼이 추천하는 바이다.

  • 언어의 온도

    언어의 온도

    크리스마스 선물로 건네기 좋은 책. 잠자리에 들기 전, 조용히 몇 장씩 넘겨보고 싶은 책.

  • 노년에 대하여

    노년에 대하여

    온전한 한 생을 살아낸 후에야 이토록 충만한 세계관이 응축되는 법이다.